(SCREAM)

2018. 7. 8.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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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홍시] 해시

2018. 5. 7. 01:07 from 카테고리 없음



#어린_자캐와_지금의_자캐가_만난다면 망함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지금 몇 년이죠? 20세기가 지나긴 했나요? 라며 종말론을 막기 위해 돌아온 영화 주인공처럼 물어본다든지, 뺨을 내리치거나 팔을 꼬집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불필요했다. 고홍시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고,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긴 뒤 한숨을 쉬었다

씨발 돌아와도 하필.

 

 코 없는 볼 모 씨 찾아 삼만리를 찍는 마법 소년처럼 번개 모양의 흉터가 욱신거리는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그랬다. 느긋하고 스산한 바람이 기분 나빴던 오후. 작위적인 복선이나 만들어진 괴담처럼 하나하나 생생하게 그날의 소동을 가리키는 지표들

SF의 주인공 감은 아니었으나 답답한 클리셰는 만들지 않았다. 먹통이 된 핸드폰의 모서리를 잡고 흔들거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목시계의 바늘과 씨름할 시간에 홍시는 가장 가까운 가게로 달려가 시간을 물었다. 앞으로 한 시간, 오십구 분, 오십팔 분시간 흐르는 감각을 입술로 외운 고홍시가 갈 곳은 정해져있었다. 망할 놈의 우물이었다.

 

 뚜껑 대신 허름한 널빤지로 입구가 반쯤 덮여 손바닥만한 빛이나 들어오면 다행일까, 위로 드리워진 버드나무 덕에 우물은 그림자 속에 잠겨있었다. 목이 쉬어라 비명을 지르다 슬슬 소리칠 힘도 없어 늘어져있을 시간대지만, 우연찮게 지나가던 인기척이 시끄럽지만 않았어도 우물 안에서 굶어죽을 운명이었다. 그 애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홍시는 혀를 찼다. 세상이 기막히게도 돌아가는구나, 어쨌거나 살 목숨이었네. 우물 안에 빠져있던 어린애를 끄집어준 사람은 지나가던 고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터무니없는 전개에 이대로 따라줘야 할지, 여기서 제가 발길을 돌리고 원래의 시간 축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다 타임 패러독스가 일어나 원자 단위로 분해되어 5차원을 떠돌아다닐지.

되짚어보지만 고홍시는 뻔한 클리셰에 발목을 잡히는 인물이 아니다. 입고 있던 옷가지를 대충 벗어 밧줄을 만든 홍시가 발로 널빤지를 차 밀었다. 안쪽에서 딱 여자애 한 명 정도의 윤곽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작고 더러우며 성질머리가 글러먹은 여자애.

 

 “, 잡고 나와!”

 

 작은 손은 야무지게도 생명 줄을 붙잡았다. 그런 기회를 사사로이 놓치면 내가 아니지만, 그래도 고홍시는 제 무게를 한껏 실어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이 무게에서 모든 것이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우물의 밑바닥에서 불행의 중력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 모든 행복의 평균치를 끌어 내리리라, 그래서 나의 불행이 평균이 되리라! 물론 앞뒤 맥락을 잘라먹고도 고홍시는 존재 자체로 배배 꼬이고 꼬인 세상의 버그 같은 존재였으므로, 남들의 평균치 이상을 살아내는 지금의 잘나가는 에디터 고홍시가 되었음에도 그런 유치하고 야비한 수작질을 관두지 않았다.

고홍시가 조금만 더 똑똑했고, 야망적이며, 운이 좋았더라면, 세상은 벌써 제3차 세계대전으로 시끄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과였다면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했을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물 밑바닥의 더러운 진흙에 너저분해진 여자애 하나가 우물 턱을 잡고 기어 나왔다. 산발로 풀어헤친 주황색 머리카락에 피가 엉망으로 뭉쳐져 있었는데, 고홍시는 여기서 욕하면 제 얼굴에 침 뱉기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도 한 마디 해주고 싶어 입을 달싹였다.

 

 “존나 못생겼다.”

 

 결국 해버렸다.

 

 “미친년 아냐? 꺼져!”

 

 구해준 사람에게 다짜고짜 신경질부터 내는 어린 시절의 자신도 정상은 아니었다.

 

 갑자기 본 햇빛에 눈이 부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문지르는데 소매에 피딱지와 먼지 얼룩이 묻어나왔다. 이미 첫인상부터 조진 마당에 더 체면 차릴 건수는 없었다.

 

 고홍시는 괜찮니? (어차피 안 괜찮을 걸 아니까.) 라든지 다친 덴 괜찮구? (당연히 나쁘겠지. 그거 성형외과에서 견적 꽤 나온단다 얘.) 같은 안부 대신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던져주는 쪽을 택했다. 아이는 여전히 경계심을 숨기지 않으며 티슈를 받아들고 얼굴을 닦았다. 반은 구해준 건 고마운데 보자마자 시비인 미친년에 대한 몫이고, 절반은 너무 익숙한 목소리와 실루엣에 대한 몫이었다.

막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라 홍시는 역광을 받고 있었고, 앞머리로 얼굴 반을 가리는 스타일은 여전히 고수 중이라 미래의 자신이라는 연결고리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아이는 아이대로 이대로 집에 돌아가 저를 우물에 던져 넣은 엄마와 한바탕 할 것인지 아니면 집이라도 나가서 콱 죽어버릴 것인지 고민했고, 고홍시는 제 과거와 마주친, 어쩌면 한 탕 크게 해서 돌아갔을 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는 시점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 모두 머리 껍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어디를 헤매다 가라앉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애초에 아무 목적도 생각도 없었으니까. 어린 고홍시는 아프고 배가 고팠고, 큰 고홍시는 혼란스러웠다.

 

 “, 분하지?”

 

 아이는 당연한 걸 묻느냔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암만 담장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쉬쉬한다지만, 모녀의 관계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종류였으므로. 고홍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급하게 뛰느라 몰랐는데, 어제 개시한 신상 구두 굽이 꺾이기 직전이었다.

 

 “아주 죽여 버리고 싶지? 다 불 질러버리고, 목에 칼이라도 쑤셔 박고, 팔 다리를 똑똑 분질러서 망할 메주 창고에 대롱대롱 매달아두고감나무는,”

 

 “뿌리째 뽑아버리고.”

 

 언제나 상상하고 또 상상하던 그 장면. 마당에 곧고 가지런하게 터줏대감이나 신령처럼 서 있는 그 튼튼하고 숭고한 감나무를 장작 패듯 갈기갈기 찢어 다시는 뿌리를 그 땅 위에 박지 못하도록 불이라도 놓는 그것. 고홍시는 입꼬리를 죽 올려 웃었다. 어린 여자애는 저 사람은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무언가의 동질감까지 느끼는 모양새였다. 고홍시는 다시 한 발짝을 다가갔다.

 

 “잘 들어, 너는 할 수 있어. 방금 말한 거 전부. 그런데, 그러려면, 더 독하게 굴어야 살아남아. 어중간하면 뭣도 안 되고 중간에 나자빠진단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네가 망쳐놓게 둘 수는 없잖니.”

 

 필요한 건 독기와 악뿐, 이하는 필요 없었다. 불신의 욕망으로 하루를 견디고 내일을 버틴다. 고홍시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건 눈 앞의 고홍시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일이였다. 그러니 큰 고홍시가 이렇게 구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어린 저를 걷어찼다. 갑작스럽게 명치에 꽂힌 구두 앞코에 어린 고홍시는 저항할 틈새도 없이 뒤로 나가떨어져 우물 벽에 등을 박았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머리채를 잡고 뺨을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양 뺨을 번갈아서. 네일아트 안 받은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실핏줄이 뜯기는 소리에 고홍시는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놓쳤다. 젖니가 채 빠지기도 전의 이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입속에 손가락이 들어가는 것도 마다 않고 깊게 눌린 잇자국 사이로 피가 송골히 오를 만큼 세게 문 흔적이 보였다. 그렇지, 이래야 나지. 덜렁거리던 구두굽이 완전히 부러졌다.

 

 “씨발 이거 안 놔! 이 미친년이, 왜 가만히 있는데 지랄이야?”

 

 “그야 미쳤으니까. 이정도로 엄살 피우지 마. 반의 반도 안 했어.”

 

 어린 고홍시가 큰 고홍시를 이기는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큰 고홍시는 화장이 무너지고, 오랜만에 패악을 부리며 상대방을 마구 짓밟았으며, 손가락 몇 마디 살점이 이에 뜯겨나가고 팔에 피멍이 들었다. 전리품 치고는 과분했다. 어린 고홍시를 질질 끌어 우물 난간에 올린 고홍시가 아이의 목을 쥐었다. 이미 상반신은 안쪽으로 넘어가있어, 홍시가 손을 놓으면 아이는 다시 떨어질테다. 우물 안으로, 바닥 깊숙한 곳으로, 다시. 여기서 조금만 힘을 주면 목 정도야 꺾는 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홍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너는 살아야하니까. 살아서 내가 되어야하니까.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사자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어미다.

 

 “너는 아무한테도 구원 못 받아. 평생 거기서 썩고 싶은 거 아니면, 스스로 기어 올라와. 찾아 올 때까지 악을 지르고, 난리를 치고, 성가시게 굴어. 모난 돌이라면 그걸로 다 찔러버려.”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이나 어린 고홍시에게 들릴 턱이 없었다. 이대로면 로또 번호를 불러줘도 못 알아듣고 실성할 상이니 고홍시는 이만 제 자신을 보내주기로 했다.

안녕, 한심한 인생아. 커서 나 같은 어른은 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어쩌겠니 운명인데. 그대로 손을 놓자 아이는 몇 번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다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똑바로 떨어졌는지 어디가 부러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멀리서 걸어올 고모댁의 그림자가 닿기 전에 발을 옮기는 홍시의 입술이 마저 시간을 외운다.

 

 일.




Posted by Citrus Rain :




Q. 하이노 케이시는 어떤 사람인가요?

 

 리에는 조금 망설이다 어색하게 웃었다. 살굿빛 틴트를 바르고도 연한 입술이 달싹였다. 제가 말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닌 거 같아요. 고심하던 인터뷰어가 볼펜으로 입술 아래를 쿡 찔렀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볼게요. 하이노 케이시는 어떤 오빠인가요?

그제야 리에는 초조하게 잡고 있던 18온스 크리스털 컵에서 손을 뗐다. 물기로 축축한 손가락을 냅킨으로 누르며 그녀는 윤곽이 확실한 활자들을 느긋하게 발음했다. 얇고 마른 입꼬리가 확신과 바람을 담고 말려 올라갔다. 이전에도 그랬고, 여전히 그럴 것이라는.

우리 오빠는정말착한 오빠예요. (ㄴㄴ 느그오래비 인성에 하자 있음)

 

 2층짜리 현대식 가옥에서 벽난로를 쓴다면 보통 벽돌을 쌓은 틀과 일렁이는 불꽃 효과 정도만 실제를 본 딴 전기난로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마른 나무를 패 장작으로 쓰고 불이 꺼지지 않게 가끔 불쏘시개로 재를 뒤적여 줘야하는 종류였다. 진짜배기라는 말이다

일찍이 성을 갈아치운 하이노 부인은 먼지가 날린다, 관리하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벽난로를 뗄 것을 요구했으나 하이노 씨는 간단명료하게 기각했다. 당신이 관리하지도 않는데 뭐

어쩌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불타는 안쪽에서 보고 있을지도 몰랐다고. 성냥팔이 소녀가 얼어 죽은 눈보라의 밤과 대조되게도 안락하고 따뜻한 온기와는 거리가 먼, 두꺼운 장작 겉을 게걸스럽게 갉아대며 태울 것이 사라지면 타는 자신 또한 사라지리라는 무의미한 파괴 행위의 난장. 과한 비약이나 적어도 하이노 씨의 장남 하이노 케이시에게는 그런 의미였다. 그도 그럴게, 하이노 씨의 폭력은 산발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케이시가 정신을 잃을 만치 맞던 날 마지막으로 서 있던 곳은 늘 벽난로 앞이었으므로.

회초리는 가늘고 탄력 있는 쇠막대였는데, 마치 기다란 지휘봉 같았다. 전두지휘를 사랑하는 하이노 씨의 성미에 맞는 모양새라고 리에는 생각했다.

소파 옆에 리에를 세워둔 지도 한참. 부드러운 카펫을 버티고 선 다리가 저려왔다. 공기와 온도까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시대에 가장 호화스러운 감옥에 서 있는 기분이 어떤지 아냐고 물으면, 감옥이 아니라 처형장이라고 고쳐줄 의사도 분명했다. 바로 옆에는 아버지가 앉아있고 그 앞에는 오빠가 서 있으며 둘의 사이에는 비닐 포장지가 하나. 조잡한 캐릭터와 요란한 형광색으로 꾸며진 포장지는 딱 손바닥만한 불량식품 하나를 겨우 감싸는 크기였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맛이었는지는 이미 공포로 휘발된 지 오래라 리에는 학교를 마치고 그날따라 조금 늦은 운전기사를 기다리는 길에서 막과자 집 하나를 스쳤으며, 벽장 안의 환상세계를 엿본 듯 두려움 내지 황홀감 비슷한 눈으로 진열대를 바라보고 있던 남매에게 주인 할머니가 주신 친절 한 조각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간신히 기억해냈다.

덧붙여 망설이던 남매가 저녁식사 전에 단 맛을 감히 입에 대었으며, 마침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놀란 리에가 남은 포장을 제 원피스 주머니에 쑤셔 넣었고, 주머니라기엔 옷에 달린 장식에 가까웠던 그 얕고 얕은 굴곡 안쪽에서 구겨진 포장지는 점차 제 본형을 되찾아 몸집을 부풀렸다는 것도식사 후 테이블 아래에 떨어진 그것을 하이노 씨가 주운 이야기는 우연에 우연이 겹친 불행이었다. 하긴, 모든 불행이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제가 먹었어요.”

 

 리에는 설탕 알갱이가 손톱 밑에 낀 손을 슬그머니 감췄다. 먹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유약한 망설임을 앞서 내다본 케이시가 리에를 뒤에 두고 섰다. 한 명이 맞든, 두 명이 혼나든, 남매가 받을 고통은 양분되지 않는다. 나눗셈이 아니라 곱하기다. 아버지의 계산법을 아는 케이시는 저를 때리다 힘이 빠진 따귀라도 여동생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런 얄팍한 수가 하이노 씨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뿐이다. 적어도 거짓말은 말아야했다.

그러냐. 케이시가 반절이 잘려나간 진실을 고할 동안 하이노 씨는 회초리를 벽난로의 불씨에 담갔다. 불꽃이 회초리 선단을 골고루 달굴 동안 리에와 케이시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일어날 수 있는 경우를 모조리 상상하려 애썼다. 들어맞으면 다행인 가능성도, 큰일인 경우가 번잡스레 섞였으나 케이시는 언제나 최악을 내다보고 있었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이 그중 중간 수위에 위치한단 것은 꽤 위안이 되었다.

 

 “하이노 케이시.”

 

 이것도.

 

 “벗어.”

 

 이것도.

 

 “네 입으로 세거라.”

 

 전부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고. 달군 회초리가 등을 지나갈 때마다 섬뜩한 소리가 났다. 살이 타고 터지는 비명이었다. 하이노 씨는 그의 아이들이 짓밟힌 벌레처럼 고통스럽게 뒹굴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틀에 맞춰 건강하고 반듯하게 성장한 물건을 원했다. 교정 방식에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는 아픔조차 내뱉으면 안 되었다.

차라리 넋을 놓고 카펫의 불규칙적인 무늬와 털실의 방향을 세면 편하련만, 규칙적인 리듬으로 내려오는 횟수를 똑바로 세기 위해서는 정신이나마 꽉 붙잡아야했다. 생생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인내해야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나, ,. 네엣, ,여섯, ,…… , 여더, 아홉. 열을 말하기 전에 케이시는 자세가 무너졌다. 등이 앞으로 굽자 하이노 씨가 뒷머리를 붙잡아 들어 올리듯 잡아챘다. 결국 케이시는 꿇은 다리에 양 손을 대고 지탱하듯 무릎을 붙잡아 버텼다. 팔 힘에는 자신이 있었다. 회초리에 힘이 실리자 등은 홧홧함을 넘어 뜨겁기 시작했다.

아픈 건 케이시일텐데 어째 울음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리에는 차마 그만하라는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원피스 자락을 부여잡아 눈물만 뚝뚝 흘렸다. 몇 살 차이 안 나지만 그래도 오빠라고, 하이노의 장남이자 리에의 첫 번째 오빠인 하이노 케이시는 아버지가 손목시계를 푸는 틈을 타 눈을 맞추고 입술을 움직였다. ‘가만히 있어.’ 리에는 수없이 들었던 가만있으라는 말을 기억한다. 리에가 이대로 있기만 하면, 일상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 축을 살포시 겹쳐놓듯 돌아온다. 톱니바퀴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름칠을 해주거나 불순물이 낀 표면을 깎아내야 한다. 케이시는 그때마다 리에를 품 안쪽으로 숨기고 대신 등을 보였다.

오빠가 잘리고 상처입어 다 닳아버리면? 맞물려 돌아갈 최소한의 돌출조차 남기지 않고 삭아버린다면?

 

 린넨 원피스의 헐렁한 카라가 다 젖도록 울던 리에가 제발 그만하라고 새되게 외치기 직전이었다. 손톱으로 무릎을 찍어가며 버티던 케이시가 드디어 쓰러졌다. 얼굴은 땀으로 엉망이었고 더 엉망인 등에 리에는 울음을 그쳤다. 불 앞에서 과하게 힘을 쓴 탓에 하이노 씨도 지쳐있었다. 그는 회초리를 불쏘시개 자리에 꽂아두고 자리를 떠났다. 떠난 자리에는 지독하게 정적이 남았는데, 리에가 상주 고용인을 부르기 직전 케이시는 짧은 기침으로 아직 의식이 붙어있음을 알렸다.

젖은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리고 무거운 눈두덩을 깜박이던 케이시가 옷을 챙겨 일어났다. 그러고는 리에를 보지 않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오빠는 혼자 있고 싶은가봐. 어린 리에는 제 딴엔 최선이라고 생각한 결정을 내렸다.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하이노 케이시는 하이노의 첫 번째 핏줄이며, 리에의 오빠고, 회사를 물려받는다니 뭐니 그것 전부 거창한 수식어에 불과했다고.

그때의 케이시는 아직 작고 약했다고.

 

 서재의 창은 정문을 향해 났으므로, 케이시와 리에의 방에서만 뒤뜰을 볼 수 있었다. 자정은 넘었고 동은 트지 않은 애매한 새벽 무렵이었다. 딱 몸 하나를 숨기기 좋도록 담장과 정원 경계에 난 덤불이 있었고, 리에는 창문 한 뼘을 겨우 열어 가로등 조명조차 닿지 않는 그 틈을 바라보았다. 들리지 않는 울음을 토해내는 오빠가 있었다. 타오르는 등을 찬 물로 대충 식히고 되는대로 약을 바르고, 등을 대고 누울 수 없어 맨 가슴으로 침대에 누웠다가 살결에 가감 없이 닿는 것들을 참을 수 없어 뛰쳐나간 케이시가.


 여기까지 온 마당에 되돌릴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있겠느냐만, 리에는 가끔 후회했다. 내가 그때 내려갔으면요. 그래서 오빠가 우는 걸 가까이서, 적어도 듣기라도 했다면요.

 

 ‘그 날이후, 남매의 법적보호자는 마사바야시 아키에가 되었다. 그러나 케이시는 그대로 하이노 케이시였다. 왜 굳이? 물으면 대답을 피했다. 대답을 확정하지 못한 건 본인도 확실하지 않아서였다. 본성은 결국 아비의 피를 빼닮았다는 반증인지, 혹은 미리 내다 본 잿빛의 운명인지.

하지만 리에는 확실히 결정했다. 세상에 하이노 케이시가 있다면 이제는 하이노 리에도 있어야 한다고. 훗날 케이시가 하이노에 휘둘려 사랑하는 것과 본성 사이에서 고민할 때 비틀린 무게 추를 잡아줄 사람 정도는 있어야 한다며.

리에는 오빠가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제정신이 아니고, 비정상이며, 이상하고, 가끔은 무섭고, 역시 섬뜩한 오빠지만 그래도.

 

 우리 오빠는 착한 오빠예요.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될 거예요. 이유가 생긴 거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름이

 

 히메미야?





Posted by Citrus Ra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