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_자캐와_지금의_자캐가_만난다면 망함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지금 몇 년이죠? 20세기가 지나긴 했나요? 라며 종말론을 막기 위해 돌아온 영화 주인공처럼 물어본다든지, 뺨을 내리치거나 팔을 꼬집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불필요했다. 고홍시는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고, 앞머리를 크게 쓸어 넘긴 뒤 한숨을 쉬었다.
씨발 돌아와도 하필….
코 없는 볼 모 씨 찾아 삼만리를 찍는 마법 소년처럼 번개 모양의 흉터가 욱신거리는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그랬다. 느긋하고 스산한 바람이 기분 나빴던 오후. 작위적인 복선이나 만들어진 괴담처럼 하나하나 생생하게 그날의 소동을 가리키는 지표들.
SF의 주인공 감은 아니었으나 답답한 클리셰는 만들지 않았다. 먹통이 된 핸드폰의 모서리를 잡고 흔들거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목시계의 바늘과 씨름할 시간에 홍시는 가장 가까운 가게로 달려가 시간을 물었다. 앞으로 한 시간, 오십구 분, 오십팔 분… 시간 흐르는 감각을 입술로 외운 고홍시가 갈 곳은 정해져있었다. 망할 놈의 우물이었다.
뚜껑 대신 허름한 널빤지로 입구가 반쯤 덮여 손바닥만한 빛이나 들어오면 다행일까, 위로 드리워진 버드나무 덕에 우물은 그림자 속에 잠겨있었다. 목이 쉬어라 비명을 지르다 슬슬 소리칠 힘도 없어 늘어져있을 시간대지만, 우연찮게 지나가던 인기척이 시끄럽지만 않았어도 우물 안에서 굶어죽을 운명이었다. 그 애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홍시는 혀를 찼다. 세상이 기막히게도 돌아가는구나, 어쨌거나 살 목숨이었네. 우물 안에 빠져있던 어린애를 끄집어준 사람은 지나가던 고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터무니없는 전개에 이대로 따라줘야 할지, 여기서 제가 발길을 돌리고 원래의 시간 축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다 타임 패러독스가 일어나 원자 단위로 분해되어 5차원을 떠돌아다닐지.
되짚어보지만 고홍시는 뻔한 클리셰에 발목을 잡히는 인물이 아니다. 입고 있던 옷가지를 대충 벗어 밧줄을 만든 홍시가 발로 널빤지를 차 밀었다. 안쪽에서 딱 여자애 한 명 정도의 윤곽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작고 더러우며 성질머리가 글러먹은 여자애.
“야, 잡고 나와!”
작은 손은 야무지게도 생명 줄을 붙잡았다. 그런 기회를 사사로이 놓치면 내가 아니지만, 그래도 고홍시는 제 무게를 한껏 실어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이 무게에서 모든 것이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우물의 밑바닥에서 불행의 중력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세상 모든 행복의 평균치를 끌어 내리리라, 그래서 나의 불행이 평균이 되리라! 물론 앞뒤 맥락을 잘라먹고도 고홍시는 존재 자체로 배배 꼬이고 꼬인 세상의 버그 같은 존재였으므로, 남들의 평균치 이상을 살아내는 지금의 잘나가는 에디터 고홍시가 되었음에도 그런 유치하고 야비한 수작질을 관두지 않았다.
고홍시가 조금만 더 똑똑했고, 야망적이며, 운이 좋았더라면, 세상은 벌써 제3차 세계대전으로 시끄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이과였다면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했을지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물 밑바닥의 더러운 진흙에 너저분해진 여자애 하나가 우물 턱을 잡고 기어 나왔다. 산발로 풀어헤친 주황색 머리카락에 피가 엉망으로 뭉쳐져 있었는데, 고홍시는 여기서 욕하면 제 얼굴에 침 뱉기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도 한 마디 해주고 싶어 입을 달싹였다.
“존나 못생겼다.”
결국 해버렸다.
“미친년 아냐? 꺼져!”
구해준 사람에게 다짜고짜 신경질부터 내는 어린 시절의 자신도 정상은 아니었다.
갑자기 본 햇빛에 눈이 부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문지르는데 소매에 피딱지와 먼지 얼룩이 묻어나왔다. 이미 첫인상부터 조진 마당에 더 체면 차릴 건수는 없었다.
고홍시는 괜찮니? (어차피 안 괜찮을 걸 아니까.) 라든지 다친 덴 괜찮구? (당연히 나쁘겠지. 그거 성형외과에서 견적 꽤 나온단다 얘.) 같은 안부 대신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던져주는 쪽을 택했다. 아이는 여전히 경계심을 숨기지 않으며 티슈를 받아들고 얼굴을 닦았다. 반은 구해준 건 고마운데 보자마자 시비인 미친년에 대한 몫이고, 절반은 너무 익숙한 목소리와 실루엣에 대한 몫이었다.
막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라 홍시는 역광을 받고 있었고, 앞머리로 얼굴 반을 가리는 스타일은 여전히 고수 중이라 미래의 자신이라는 연결고리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아이는 아이대로 이대로 집에 돌아가 저를 우물에 던져 넣은 엄마와 한바탕 할 것인지 아니면 집이라도 나가서 콱 죽어버릴 것인지 고민했고, 고홍시는 제 과거와 마주친, 어쩌면 한 탕 크게 해서 돌아갔을 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는 시점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각 모두 머리 껍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어디를 헤매다 가라앉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애초에 아무 목적도 생각도 없었으니까. 어린 고홍시는 아프고 배가 고팠고, 큰 고홍시는 혼란스러웠다.
“너, 분하지?”
아이는 당연한 걸 묻느냔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암만 담장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쉬쉬한다지만, 모녀의 관계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종류였으므로. 고홍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급하게 뛰느라 몰랐는데, 어제 개시한 신상 구두 굽이 꺾이기 직전이었다.
“아주 죽여 버리고 싶지? 다 불 질러버리고, 목에 칼이라도 쑤셔 박고, 팔 다리를 똑똑 분질러서 망할 메주 창고에 대롱대롱 매달아두고… 감나무는,”
“뿌리째 뽑아버리고.”
언제나 상상하고 또 상상하던 그 장면. 마당에 곧고 가지런하게 터줏대감이나 신령처럼 서 있는 그 튼튼하고 숭고한 감나무를 장작 패듯 갈기갈기 찢어 다시는 뿌리를 그 땅 위에 박지 못하도록 불이라도 놓는 그것. 고홍시는 입꼬리를 죽 올려 웃었다. 어린 여자애는 저 사람은 누군가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무언가의 동질감까지 느끼는 모양새였다. 고홍시는 다시 한 발짝을 다가갔다.
“잘 들어, 너는 할 수 있어. 방금 말한 거 전부. 그런데, 그러려면, 더 독하게 굴어야 살아남아. 어중간하면 뭣도 안 되고 중간에 나자빠진단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네가 망쳐놓게 둘 수는 없잖니.”
필요한 건 독기와 악뿐, 이하는 필요 없었다. 불신의 욕망으로 하루를 견디고 내일을 버틴다. 고홍시는 그렇게 살아왔고, 그건 눈 앞의 고홍시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일이였다. 그러니 큰 고홍시가 이렇게 구는 것도 당연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어린 저를 걷어찼다. 갑작스럽게 명치에 꽂힌 구두 앞코에 어린 고홍시는 저항할 틈새도 없이 뒤로 나가떨어져 우물 벽에 등을 박았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머리채를 잡고 뺨을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양 뺨을 번갈아서. 네일아트 안 받은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실핏줄이 뜯기는 소리에 고홍시는 머리카락을 잡은 손을 놓쳤다. 젖니가 채 빠지기도 전의 이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입속에 손가락이 들어가는 것도 마다 않고 깊게 눌린 잇자국 사이로 피가 송골히 오를 만큼 세게 문 흔적이 보였다. 그렇지, 이래야 나지. 덜렁거리던 구두굽이 완전히 부러졌다.
“씨발 이거 안 놔! 이 미친년이, 왜 가만히 있는데 지랄이야?”
“그야 미쳤으니까. 이정도로 엄살 피우지 마. 반의 반도 안 했어.”
어린 고홍시가 큰 고홍시를 이기는 일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큰 고홍시는 화장이 무너지고, 오랜만에 패악을 부리며 상대방을 마구 짓밟았으며, 손가락 몇 마디 살점이 이에 뜯겨나가고 팔에 피멍이 들었다. 전리품 치고는 과분했다. 어린 고홍시를 질질 끌어 우물 난간에 올린 고홍시가 아이의 목을 쥐었다. 이미 상반신은 안쪽으로 넘어가있어, 홍시가 손을 놓으면 아이는 다시 떨어질테다. 우물 안으로, 바닥 깊숙한 곳으로, 다시. 여기서 조금만 힘을 주면 목 정도야 꺾는 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홍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너는 살아야하니까. 살아서 내가 되어야하니까.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사자를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어미다.
“너는 아무한테도 구원 못 받아…. 평생 거기서 썩고 싶은 거 아니면, 스스로 기어 올라와. 찾아 올 때까지 악을 지르고, 난리를 치고, 성가시게 굴어. 모난 돌이라면 그걸로 다 찔러버려.”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이나 어린 고홍시에게 들릴 턱이 없었다. 이대로면 로또 번호를 불러줘도 못 알아듣고 실성할 상이니 고홍시는 이만 제 자신을 보내주기로 했다.
안녕, 한심한 인생아. 커서 나 같은 어른은 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어쩌겠니 운명인데. 그대로 손을 놓자 아이는 몇 번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다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똑바로 떨어졌는지 어디가 부러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멀리서 걸어올 고모댁의 그림자가 닿기 전에 발을 옮기는 홍시의 입술이 마저 시간을 외운다. 삼… 이…
일.
